신보슬 큐레이터, 2022
당신의 목소리를 보여주세요.
여느 때처럼 아침 7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일없냐는 질문에 엄마는 별일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별일 없지 않다는 것을.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보가 가라앉아 있었고, 미세하게 떨렸다. 엄마는 애써 괜챦은 척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무슨일이냐 나의 다그침에 걱정할까봐 말 안하려고 했다면서… 밤새 아빠가 몸이 많이 안좋아서 지금 응급실에 와 있다고 했다. 예전처럼 우리가 메신저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었더라면, 엄마는 아빠가 퇴원하고 난 후에야 별일 아니라는 듯 지나는 말로 “네 아빠가 몇일전에 응급실에 갔었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류은미의 (목재, 가변설치, 2022)를 보았을 때,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매끄럽게 따뜻한 엄마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애써 별일없다고 말하던 그 날의 엄마 목소리를 본 것 같았다. 목소리는 그렇게 색깔이 있고, 무게가 있고, 질감이 있다. 그래서 목소리는 듣는 것이기도 하지만, 촉각적이기도 하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목소리의 특징들은 감정을 전달하기에 적합한 매체가 된다.
류은미도 같은 이유에서 목소리를 작품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일상의 대화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늘 어려웠다고 했다. ‘화가나’, ‘행복해’, ‘웃기다’ 등등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감정을 단어로 말하고 나면, 어딘가 부족하거나 과한 느낌이 든다. 내 감정을 정확하게 ‘말’로 전달하기란 늘 어렵다. ‘말’로 규정되는 순간 그것은 곡해와 오류에 무차별하게 노출된다. 하지만, 목소리는 다르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음역대가 있고, 강도, 말하는 속도 등 다양한 요소들이 목소리에 녹아들기 때문에 (목소리 역시 우리를 기만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데 적합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작가는 목소리 수집에 나선다. 그리고 반복해서 들으면서 어떤 감정이었을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그 때의 느낌을 복기하기도 한다. 목소리를 복기하는 과정은 작업의 과정이다. 마치 만다라를 그리듯 목소리의 파장을 한지나 종이위에 펜으로 그리기도 하고, 나무기둥으로 매끈하게 조각처럼 깎아 세우기도 한다. 하나의 조각은 한사람의 목소리가 되지만, 높낮이가 다른 목소리의 목조각들을 한데 모아 세우면 마치 여성합창단의 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목소리에 컬러를 입혀 허공에 매달아 설치하면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한층 더해진다. 컬러풀한 FRP로 만든 를 보고 있으면 마치 놀이동산에 가 있는 듯 달뜬 기분이 들고, 뮤지컬 한편을 보는 느낌이라면 내가 작품에 너무 과몰입한 결과일까?
최근 작업에서 류은미는 입체적으로 구현했던 목소리의 파장을 다시 평면으로 전환시켰다. 평면이긴 하지만, 렌티큘러 작품이기 때문에 관람객의 동선에 더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라는 시리즈 제목처럼 화려한 색상으로 변화된 작품은 훨씬 더 감각적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입체적으로 쌓아 올려 보여지는 목소리가 아닌 가로형으로 높낮이를 바꾸어 보여주는 파형으로, 조각의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이 아닌, 관객의 움직임에 직접반응하는 것으로의 실험은 작가에게 목소리를 주제로 할 수 있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에 빼곡이 채워진 나무 조각의 목소리 사이를 걷는 느낌과 렌티큘러 앞에서 색깔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매우 다른 경험이었다. 전자의 작업이 목소리 ‘안’에 들어가 있다면, 후자는 목소리를 ‘듣는’ 움직임을 닮았다. 전자가 목소리의 따뜻하고 푸근하을 담았다면 후자는 도회적인 목소리의 느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둘이 합쳐진다면? 여기에 특정 감정이 더해진다면? 감정과 소통을 주제로 한 류은미의 ‘목소리’ 탐구는 어쩌면 아직도 시작단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목소리를 듣고, 채집하고, 보는 과정에서 또다른 감정의 파장(sentimental wave)를 보여주길 기대해본다.